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마도 정벌 (문단 편집) ==== 일본에 미친 영향 ==== 앞서 언급되었듯이 대마도 정벌은 조선 측이 독자적으로 진행한 것이 아니라 조선 조정에서 미리 일본의 [[규슈]] 쪽에 정벌의 뜻을 알리고 난 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조말생과 허조에게 명하여 일본국 규슈(九州)에서 사자(使者)로 보내온 정우(正祐) 등 네 사람을 제군(諸君)의 처소에서 대접하게 하고, 따라온 사람들은 배가 머물러 있는 곳으로 보내라고 이르고, 우리나라에서 대마도를 토벌할 뜻을 말하되, 너무 놀라게 하지는 말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각각 따라온 사람들을 다 내세우니, 5인이므로, 임금이 옷을 주어 판관 최기(崔岐)로 하여금 압행(押行)하게 했다. >---- >『세종실록』 4권 1년 (1419년 기해) 5월 23일(정묘) 6번째 기사 이 정보를 들은 일본 측의 반응은 황족(皇族)인 후시미노미야 사다후사 친왕(伏見宮貞成親王)의 일기인 『간몬교키(看聞御記)』에서 드러나는데 당시 일본을 통치하던 [[무로마치 막부]]에선 이 같은 소식을 듣고 상당히 놀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건 그렇고 지금 막 대당국, 남만, 고려 등이 일본을 공격해온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었다. 고려가 알렸다고 한다. 무로마치도노는 매우 놀라셨다. 단 신국(神国)에게 무슨 일이 있겠는가. >---- >『간몬교키』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막부는 조선의 예고를 듣고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대마도를 공격하는 나라에 대한 정보가 정확하지 않았고 명나라(대당국) 등도 공격의 주체로서 회자되고 있었다. 물론 1419년 사건을 전후해서 명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요구하는 등의 사건은 있었지만, 직접 대마도 공격에 관여하지는 않았으나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은 계속되어 이후에도 '대당봉기(大唐蜂起)' (応永26年 6月25日), '당인습격(唐人襲來)' (応永26年 6月29日), '사쓰마에 도착한 이적은 몽고라고 한다(薩摩ニ付異賊蒙古云々)' (応永26年 5月23日) 등 명나라가 크게 의식되고 있으며, 그 호칭도 당(唐), 몽고(蒙古)라고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 확인된다. 이러한 용어의 혼동은 조선의 대마도 정벌이 1274년과 1281년, 2차례 있었던 [[원나라의 일본원정|몽골의 일본 습격]]을 상기시키고 있다는 점을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전황의 전모는 대마도 정벌이 끝난 지 두 달 후인 같은 해 8월에 규슈(九州)로부터 탐제주진장(探題注進状)이 도착하여 밝혀지게 된다. >황송하옵게도 아뢰옵니다. 6월 20일 몽골, 고려 모두 협동하여 군세 500여 척이 대마도에 접근해 왔습니다. 그 섬을 빼앗으려고 하는 동안은 우리들과 다자이노 쇼니의 군세만이 바로 대마도의 포구에 도착하여 낮과 밤사이에 전투를 치렀습니다. 그동안 죽은 적의 숫자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전투가) 이미 몹시 어려워졌을 때에 (규슈의) 9개 지역의 군세를 모았습니다. 같은 달 26일 각각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안부를 알 수 없는 전투를 치르는 동안 이국의 군병 3천7백여 명을 죽이고 베어버렸습니다.[* 골때리게도 일본 위키피디아에서는 이 선전성 전과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여 조선군의 손실이 3,700명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조선 측의 전과 기록이 일본측의 손실 기록과 거의 일치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 외에는 숫자를 알 수 없습니다. 전체 해상에 떠있는 것 적의 함선은 1300여 척이었습니다. 수군에게 명령하여 주야를 가리지 않고 벌인 곳곳의 전투, 또는 미처 배에 타지 못하고 해상에 가라앉은 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 >그러는 동안 한창 전투가 진행되는 가운데에 기이하고 불가사의한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적의 배에서 비와 바람이 진동했습니다. 천둥이 치고 싸락눈이 내렸습니다. 추위로 손이 얼어 무기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얼어 죽는 자 그 수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기이한 현상은 전투가 어려울 때에 어디로부터 인지 알 수 없는 3종류의 비단의 깃발을 단 큰 배 4척이, 대장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여인이었습니다. 그 힘은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몽골의 배에 옮겨 타 군병 300여 명을 손으로 들어 바다로 던져버렸습니다. 대장은 몽골의 남자와 그 외에 죄가 있는 자 28명을 즉시 베어버렸습니다. 남은 7명은 위의 뜻에 따라 남겨두었습니다. 27일 한밤중에 이국의 남은 병사들도 모두 물러갔습니다. 몽골군은 전사했다고 소문이 났지만 그것은 아직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 외의 적선도 7월 2일 모두 물러갔습니다. 이와 같이 급속하게 종결된 것은 모두 신명의 위력에 의한 것입니다. 이 문서는 7월 15일 자 「탐제모치노리(探題持範)」의 이름으로 작성된 것인데 당시의 탐제는 모치노리가 아니라 시부가와 요시토시(渋川義俊)이며, 내용적으로도 다자이(太宰)의 쇼니(少弐)는 물론, 1419년 사건에서 규슈탐제가 대마도에 협력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적군의 배에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추위로 인해 손이 얼어붙었다는 기록 역시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즉 이 주진장의 출처는 불분명하며, 그 내용도 전황을 정확하게 알리는 것이 아니라 전투에 참가하지도 않은 다자이의 쇼니와 탐제의 공을 강조하고, 기이현상을 보고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만 태풍과 관련해서는 대마도를 공격한 조선군이 태풍이 올 시기라는 점을 감안하여 후퇴했다는 기록만이 확인될 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어디선가 알 수 없는 배가 나타났고 그 배의 대장은 여인이었으며, 이러한 싸움의 종결이 신위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고 여기에 등장하는 여인에 대해서도 [[신공황후]](神功皇后)라는 설이 제시되고 있다. 또한 훗날에 편찬된 다른 일본 사료인 『종씨가보(宗氏家譜)』에선 조선군 사망자가 2,500여 명이라는 기록이 나오고 『조선통교대기(朝鮮通交大紀)』에선 조선군 1,500명을 죽이고 배를 불살랐다고 나오나 마찬가지로 전공을 과장한 것이다. 어찌 됐든 이러한 인식에 기초해 일본에선 이 전쟁을 승전으로 여겨 신들이 일본을 지켜주고 있다는 신국사상(神國思想)이 더 짙어졌으며 [[노가쿠]](能楽) 「백락천(白楽天)」의 제작에까지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天野文雄(2002) 「≪白楽天≫と応永の外寇ー久米邦武と高野辰之の所説を検証する」 松岡心平編 『ZEAMI』 森話社, pp.128~146. 김정희, 2014, 「백락천(白楽天)」과 조선의 대마도 정벌과의 관련성 -노가쿠(能楽)와 정치의 관계라는 시점에서-] 여담으로 이렇게 과장된 승전보로 인해 일본 막부에선 조선이 일본 침공을 한다고 난리가 나는 계기가 되었다. 1420년 일본에 회례사로 파견된 송희경이 막부 관료들에게서 조선이 일본 정벌을 명나라와 준비하냐는 질문에 당황해하며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진실은 쇼니 미쓰사다가 올린 보고에 자신이 상대한 게 명나라 1천 척, 조선 3천 척이 언급되었기 때문. 덕분에 송희경은 이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해야 했다.[* 일본행록의 기록에 따르면 송희경은 이후 쇼니 미쓰사다는 조선에게 대마도가 입은 피해 때문에 조선 해안 마을을 불태우겠다는 말을 했으며, 이에 송희경이 쇼니 미쓰사다와 직접 만나서 해명을 하려고 했으나 쇼니 미쓰사다는 중을 보내서 '조선이 대마도를 침공해서 매우 불쾌하다'라는 말을 전달했을 뿐 만나지를 않았다. 10여 년 후의 일이지만 오우치 모리하루에게 패배하자 조선은 쇼니에게 줄 선물을 오우치에게 주면서 빅엿을 먹여 버린다.] 송희경 본인도 원래는 회례사로 일본에 방문하려 했는데 쓰시마에서 막부가 조선의 침공에 대해 걱정하는 것을, 교토 근처에선 쇼니 미쓰사다의 왜곡 보고를 들어서 일정에도 없던 오해를 풀어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